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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9 한국 진보적 대중의 자기 배반 >국내정치 2023. 1. 9. 12:13
조세희 선생이 별세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쓴 22년 12월 25일자 기사였다. 다들 비슷비슷한 부고와 달리 최재봉 기자는 조세희 선생이 이미 집필한 소설의 출판을 포기한 내용을 실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난쏘공>에 이어 조세희는 소설집 <시간여행>(1983)과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1985)를 펴냈다. 1990년 무렵 장편소설 ‘하얀 저고리’를 잡지에 연재했으나 연재를 마친 뒤에도 끝내 책으로 내지는 않았다. 동학농민전쟁에서 1980년 5·18광주항쟁까지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를 통사적으로 다룬 이 소설은 <난쏘공>과는 다른 소재와 형식을 통해 <난쏘공>에 이어지는 문제의식을 담은 또 하나의 역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조세희는 생전의 어느 인터뷰에서 “원고지로 삼천장 이상은 쓰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고 말한 바 있다. <난쏘공>이 원고지로 1200장 정도 분량이니, 그보다 분량이 좀 더 긴 ‘하얀 저고리’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하얀 저고리’를 출간하지 않은 일과 관련해 생전의 그는 “내 소설의 일차적 독자들인 동시대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고 고통스럽게 토로한 바 있다. 동시대 사람들과 시대 상황에 대한 불만과 항의의 표시로 문학적 ‘침묵’을 택한 것이라고 이해할 만한 발언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조세희 선생이 “내 소설의 일차적 독자들인 동시대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고통스럽게 토로한 부분이다.
오늘 한국사회를 바라보면서 대중들이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조세희 선생께서 생각했던 내용과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한다. 1990년대 조세희 선생은 동시대 사람들의 정체를 무엇이라고 느꼈을까? 긍정적인 내용은 아닐 것이라 추측한다. 반역사적이며 반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금 대중들도 스스로를 배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1990년대 조세희 선생이 느꼈던 것과 별차이가 없지 않을까 한다. 현시점에서 가장 반동적이고 반역사적인 경향을 띠는 것은 바로 대중들이 아닌가 한다. 원래 대중이란 진보를 의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상당수 대중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배반하고 극우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과 냉전의 산물이라 하겠다.
내가 정말 실망하는 것은 진보를 지지했던 대중들의 위선적인 태도이다. 그들은 무비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진영을 지지하고 있다. 아니 그들은 진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숭배한다. 문재인과 조국 사태 그리고 이재명의 경우를 보면서 한국의 진보적 대중들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도덕율과 합리적 이상을 괄호쳐서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신앙으로의 진보를 외쳤다. 그들이 보인 태도는 파시즘을 지지했던 대중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원래 파시즘이란 극우적 이데올로기를 말하지만 한국에서 진보적 대중들이 보여준 태도는 좌파 파시즘이라고 할만 했다.
여전히 조국이 무슨 잘못을 했으며, 윤미향이 무슨 잘못을 했고, 이재명이 무슨 잘못을 했으며, 문재인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볼멘 소리를 하는 대중들은 자신의 이성과 도덕율을 괄호친 것이다. 권력자들에게는 항상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권력자들을 규제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독재의 도구일뿐이다. 한국의 진보적 대중들은 스스로 독재와 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시대의 어려움이 있을때 한국의 대중들은 역사발전의 변곡점에 서 있었다. 현재의 한국 대중들은 반동적 역사의 변곡점에 서 있다. 극우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보적 대중도 스스로를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를 해야 할 때가 있지만 절대적인 기준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때도 있다. 적어도 지금은 비교가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 더 중요하다. 진보를 참칭한 정치인들이 절대적인 기준을 한참은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비교는 절대적인 기준을 넘어 서 있을때 비로소 가능하다.
진보파시즘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진보적 대중들의 무조건적인 지지 때문이다. 대중의 무조적인 지지는 결국 자기 이익을 배반하는 행위로 귀결될 뿐이다. 조세희 선생이 말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시대인이란 결국 이런 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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