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3-2-11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국제질서의 변화 전망 : 변증법적 통일의 가능성에 대해>
    국제정치 2023. 2. 11. 08:26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국제질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언급한 적이 있다. 다극체제, 제국주의 대 피지배국가, 시장자원국가대 기술군사국가, 국가독점자본주의 대 시장자본주의 등의 가능성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이글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현재 갈등과 충돌을 하고 있는 두개의 커다란 힘이 변증법적 통일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머리속을 떠돌던 생각을 처음 글로 옮기는 것이라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지만, 이번에는 초보적인 개념의 정리를 하고자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과연 잘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좌표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가장 최상이며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최상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그 시대의 지배세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대를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것은 대부분 지배세력의 선전선동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런 선전선동의 영향을 배제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국제질서가 다가올 것인지에 대한 전망과 예측은 중요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패권 경쟁으로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질서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미국 스스로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떤 질서가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은 신자유주의에서 탈피하여 중상주의적 질서로 돌아가려하고 있다.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자국의 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공백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의 경제적 기반은 미국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이 패권을 장악하더라도 미국과 같은 금융자본이 형성될 가능성은 없다. 중국은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로 선회한 것을 비난하면서 자유무역을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이 과연 자유무역을 주장할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중국은 겉으로는 자유무역을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교묘하게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물러나면 그 공백은 어떻게 채워질 것인가? 결국은 승자의 원리와 원칙이 세상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해본다. 미국이 중상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번 패권경쟁은 미국이나 중국과 러시아냐 하는 문제를 넘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에도 큰 변화를 초래하리라 생각한다. 

     

    막연하지만 필자는 프랑스 혁명이후 형성된 유럽의 nation state에  질적인 변화가 발생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미국의 배패와 후퇴는 결국 서양 근대사의 후퇴와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서로 자웅을 겨루고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체제와 가치가 최고라고 주장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자신들의 가치와 체제가 더 진보적이고 발전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엇이 더 역사적으로 발전적인가는 어떤 기준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중에서 어떤 사상과 체제가 더 우위에 있는가에 대한 평가도 그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분명한 것은 공산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삼은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현실사회주의의 이념이 자본주의보다 더 역사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패배한 사회주의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승리한 미국의 금융자본은 전리품을 챙기는데 눈이 멀어 통합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방기했다. 그 틈을 중국과 러시아가 밀고 들어 온 것 아닐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는 성장과 발전의 조건이지만 자본의 축적과정이 없이는 성장하고 발전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야누스적 존재다. 미국은 19세기까지 미국대륙내에서 자본의 축적과정을 거쳤고,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대외적 자본의 축적과정을 거쳤다. 자본의 축적과정은 예외없이 폭력적이었고 착취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은 성장과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그 풍요는 모든 인간에게 다 공평하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고, 경쟁에서 탈락한 인간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없었다. 성장과 풍요는 경쟁에서 이긴 국가에게 돌아갔고, 승리한 국가의 대중들은 각각의  승리만큼 성장과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승리한 국가의 패배한 대중들은 성장과 풍요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었다. 세계 최고 부자나라인 미국의 대도시에 노숙자가 넘쳐 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쟁에서 탈락했으니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러시아의 대도시에 미국과 같은 노숙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별로 없다. 러시아가 가장 어려웠을때인 1990년대 초반의 모스크바에서도 노숙자를 본 기억은 없다. 러시아는 가장 어려워서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때 러시아 인민들은 서로 연대하면서 생존하고 어려움을 극복했다. 미국은 러시아보다 훨씬 잘 살고 있지만 러시아 인민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연대를 미국 시민들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미국에서 자선은 있지만 연대와 공존은 없었다.  

     

    자본주의란 자본이 정치를 장악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자본주의의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익에 따라 민주주의부터 파시즘까지 극단과 극단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그 모습을 카멜레온처럼 바꿔 나간다. 미국의 민주주의도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파시즘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미국과 얼마나 파시즘에 가까이 와 있는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는 개인의 활력과 창의력이 국가가 중심이된 조직적 관리능력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파시즘적 통제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창의력과 사회의 활력을 자본의 이익으로 연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며, 이런 제도적인 장치는 언제든지 통제사회의 메카니즘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독일의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서 파시즘으로 넘어간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변화가 미국에서도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미국은 중상주의적 국가로 넘어가고 있다. 보호무역과 중상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현상은 불가피하다. 미국도 앞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방정부의 기능과 역할이 강력해질 것이다. 연방정부의 기능강화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고 그 이데올로기의 바탕이 파시즘이 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물론 미국적 여건 덕분에 독일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파시즘이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한 정도의 파시즘적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일 것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보편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익을 위한 체제이지 이념을 추구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체제가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nation state가 형성되었다. Nation state를 민족국가라고 하다가 요즘은 국민국가라고 부른다. 민족국가나 국민국가 모두 nation state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것보다 nation state라는 용어자체가 프랑스 혁명이후 형성된 유럽 국가들의 성격과 기능 그리고 그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프랑스 혁명이후 나타난 유럽의 국가는 Nation state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 국가라고 하는 것이 훨씬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고 하겠다. Nation state라는 명칭은 유럽의 우월성을 강조하기위한 일종의 수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200년 넘게 학자들이 Nation state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명명 자체가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부르주아 국가라고 하는 것이 훨씬 본질에 가깝다고 하겠다.  

     

    미국과 유럽의 nation state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국가라는 측면에서 보면 동양의 국가들이 훨씬 더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이 동양의 국가를 폄훼한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동의하기 어렵다. 프랑스 혁명이후의 국가를  과연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그 국가라는 것이, 정치권력이 과거 왕과 귀족으로부터 부르주아지에게 넘어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민들의 입장에서는 정치권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과거와 별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물론 부르주아지 국가에서 인민들은 선거에 참여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들에게 얼마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부르주아지들이 구축한 질서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되지 못했다. 부르주아 국가에서 인민은 정치과정에 형식적으로만 참여할 수 있고 국가 운영에는 완전하게 배제된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금융자본이라고 하는 자본권력, 즉 경제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소위 nation state란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Nation state의 정치권력 행사는 매우 교묘하다. 인민의 대의를 반영하는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자본권력의 요구대로 국가를 운영한다. 미국을 과두정이라고 규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자본의 이익을 위한 과두정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형식상 조금 차이는 있으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과두정이나 독재는 별로 다르지 않다.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지만 내용적으로 정교하게 여러 기재를 동원하여 독재를 하는 것을 과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나 서양과 달리 동양은 정치권력이 다른 모든 권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국가권력은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었고 이는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담보했다. 중국이 2천년 넘게 동양에서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조직 때문이다. 

     

    전통적인 동양세계에서는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넘어 설 수 없었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넘어서는 것을 역사적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경제권력이 주인인 서구식 nation state에서 인민의 생활수준은 체제유지의 최하한 선에 머무는 경향을 띤다.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를 보면 인민생활 수준의 유지와 향상은 정치권력 유지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즉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정치권력이 미국보다 훨씬 더 인민의 이해관계에 더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과 국가가 인민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정치권력은 인민과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경향을 보여주는 반면, 미국의 정치권력은 인민들보다 경제권력에게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다. 미국에서 인민이란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관심만을 받을 뿐인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인민에게 더 민감한 반응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과 인민사이의 소통을 방해하는 경제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교적 적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냉전 이후 미국과 서구의 부르주아 체제는 anti-these이며, 등소평 이후의 중국과 푸틴이후의 러시아는 syn-these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주도권은 서양이 아니라 동양적 세계로 넘어온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위기에 봉착했다. 한국의 정치권력은 인민의 삶보다 경제권력의 눈치를 더 보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권 때부터 였다. 노무현 정권은 삼성공화국이라고 불렸으며, 재벌이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향은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윤석열 정권들어 한국의 정치권력은 재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기업우호적인 환경으로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명목하에 인민의 삶은 철저하게 관심에서 배제되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인민들이 정치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완전히 부르주아 국가화되어 버린 것이다. 

     

    미국과 서구가 주장하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보호하기위한 제도적 장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점에서 박정희 정권과 윤석열 정권은 그 궤를 달리한다. 박정희는 자본권력을 압도하면서 자본을 키웠다. 반면 윤석열은 자본에 압도당해 인민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진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국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변증법적 통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결국 정치권력이 경제권력과 인민의 삶을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이 경제권력과 좀 더 거리를 두고 인민의 삶과 거리를 더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역사가 그렇듯이 이런 힘의 역학관계가 바뀌려면 어마어마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현명하다면 역사의 소용돌이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패권경쟁은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진보적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Designed by Tistory.